돌봄과 문화예술

10. 하데스타운 [돌문예]

2022. 5. 30. 22:46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 처음으로 뮤지컬을 보고 왔다. 수업 덕분에 그리스 신화에 관심도 생겼는데 부산에 하데스타운이 공연한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예매했다. 

 

내가 본 회차의 캐스트

 

 

뮤지컬 하데스타운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를 재해석해서 뮤지컬로 만든 작품이다.

 

 

신화에서의 님프 에우리디케와 달리, 뮤지컬 속 에우리디케는 항상 굶주림을 겪던 바람 따라 떠도는 여인이다. 요리사로 일하는 가난한 음악가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던 중 봄과 여름에 지상에 나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페르세포네가 하데스 때문에 아주 잠깐 지상에 왔다가 다시 하데스타운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데스타운은 점점 공업화되어가고 지상보다 더 밝고 더워졌다며 페르세포네는 "이건 정말 정상 아니야"라며 한탄하며 술독에 빠진다. 하데스는 계속 공업화되는 지하의 모습은 페르세포네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만든 것이라 말한다.

 

 

페르세포네가 일찍 하데스타운으로 돌아가 봄과 여름이 사라져 더욱 살기 팍팍해진 지상에서 봄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 오르페우스가 노래를 만든다. 그 사이 에우리디케는 풍족하게 살게 해 준다는 하데스의 꾀임에 넘어가 하데스타운으로 가는 기차에 타게 된다. 신화의 내용과 같이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찾으러 하데스타운으로 떠난다.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앞에서 그가 만든 노래를 부른다. 오르페우스가 만든 그 노래는 사실 하데스와 페르세포네가 사랑에 빠졌을 때 불렀던 노래였고, 오르페우스의 노래를 계기로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는 춤을 추며 관계를 회복한다.

 

 

오르페우스의 노래에 감동했지만, 그래도 지하의 법칙을 거스르게 할 수 없는 하데스는 지상에 도착하기 전까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를 걸고 오르페우스와 페르세포네를 보내준다. 하지만 그 결말은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끝이 난다. 오르페우스는 운명의 세 여신의 부추김에 뒤를 돌아보게 되고, 오르페우스 뒤에 있던 페르세포네는 다시 지하로 가게 된다.

 

 

극 중에서 나레이터 역할인 헤르메스가 이렇게 노래한다.

아주 오래된 사랑 이야기와 슬픈 노래는 이렇게 흘러가지.
중요한 것은 결말을 알면서도 다시 노래를 시작하는 것. 이번엔 다를지도 모른다고 믿으면서.
내 친구에게 배운 교훈이죠.

 

 

그리고 다시 뮤지컬의 첫 부분이 반복되며 끝난다.

 

 

 

 

뮤지컬에서 나오는 산업화된 하데스 타운 그리고 하데스의 노래에서는 현대 자본주의의 냄새가 물씬 났다. "가난이 우리의 적. 못 가진 사람들은 우리 것을 탐하지. 우리 자유롭기 위해서 벽을 높이 쌓는다."는 노랫말에서도. 고전을 재해석해서 지금 현실세계의 문제를 고발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는 신화에서도 뮤지컬에서도 결국은 비극이다. 하지만 헤르메스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감히 산 사람이 지하세계에 연인을 찾으러 가는 것을 누군가는 어차피 실패할 것이라 시도조차 하지 않겠지만 그러는 이에게는 기회조차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뮤지컬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넘버인 Epic III

F1963에 갔을 때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별 기대 없이 들어간 전시에서 맘에 드는 작품을 만나서 그 작품에 대해 느낀 점을 써 보려 한다.

 

유은석 작가의 <우린 때론 너무 치열하지 않나>라는 작품이었다. 마블 유니버스 히어로 토르와 캡틴 아메리카가 심각한 표정으로 싸우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뿅망치 게임을 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우리 모두는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떤 문제로 너무나 괴롭고 치열하게 노력했지만 문제의 해결여부와는 관계없이 시간이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예전의 치열했던 나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그걸 그렇게까지 노력했었나' 하는 약간의 애잔함, 그렇게 치열하게 노력했던 경험이 있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이 섞여 좀 복잡한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이 작품에서의 히어로들도 싸울 당시엔 절체절명의 순간이였지만 모든 일들이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 웃음이 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나고 보면 별 것 아닌 일이라고 그 문제를 지나치거나 회피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문제, 상황, 목표가 있다면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을 했든 실패를 했든 경험을 쌓아 나에게 후회가 아닌 웃음을 남길 수 있도록 하는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실패해도 경험은 남지만, 회피하면 남는 것은 후회 뿐이므로.

 

 

최근 부산시립교향악단은 정기연주회 전에 먼저 교향곡을 먼저 선보이고 음악 칼럼니스트의 해석도 들을 수 있는 심포니야()와 협주곡 리허설을 볼 수 있는 미완성 음악회라는 예비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개인적으로 공연 리허설에서의 알록달록한 단원들의 옷차림도 즐겁고, 협연자와 오케스트라 사이의 상호작용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해서 최근엔 정기공연보다 미완성 음악회를 자주 보러 갔었다.

 

이번 공연의 협연자는 파가니니 콩쿨 우승자인 양인모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거기에다 바이올리니스트의 현란한 스킬과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를 감상하기 좋은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이라니 관람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부산문화회관으로 향했다.

 

리허설 공연이지만 지휘자가 관객들을 위해 오케스트라가 협주자와 협주곡을 맞춰보는 과정을 설명 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리허설 공연이지만 관객의 접근성이 나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난다면 보기를 추천한다. 특히 이번 리허설에서는 협연자인 양인모 바이올리니스트와 지휘자가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리허설 초반에는 협주곡의 거의 전 부분을 연주 해보고 파트별로 조정하고 후반에 또 3악장을 제외한 부분을 다 연주하는 식으로 리허설이 진행되었다.

 

무대 위의 모든 사람들이 음악을 오래 해왔고, 프로이신 분들이라 무언가 지휘자가 말하는 수정사항을 반영해 바로바로 소리가 변하는 것과 지휘자와 협연자 각자의 해석을 존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였다. 정확히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연주자들에게 "이 곡을 저보다 바이올리니스트인 여러분이 더 잘 아시겠지만"이라고 말하며 연주자가 그동안 악기를 다루면서 이룬 것을 존중하는 말로 시작하는 점도 좋았다.

 

리허설인 미완성 음악회는 보았지만, 정기연주회가 있던 날은 일정이 있어서 관람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 하지만 미완성음악회도 정말 좋았다.

 

파가니니 콩쿨에서 양인모가 연주했던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영상을 덧붙인다. 나와 같은 감동을 누군가와 나눌 기회가 되길 바라며.

 

 

 

우고 론디노네전이 부산 국제갤러리에서도 개최된다는 소식에 다녀왔다이번 전시 nuns and monks by the sea는 동일한 전시명으로 서울부산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그렇게 동일한 전시 주제로 다른 공간에서 전시한 것은 작가가 둘 이상의 시공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작가가 의도하여 이뤄진 것이라 한다

 

우고 론디노네는 스위스 출신으로 지금은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 중인 작가이다. 그는 조각, 회화, 사진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몰라도 그의 작품은 어느 사진에서 본 사람들(특히 SNS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우고 론디노네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색색의 돌을 쌓은 설치작품이다중국의 수석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라고 한다. 색색의 돌 각각의 색채 대비도 강렬한데 황량한 사막 가운데 서있는 돌이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한다. 

 

Seven Magic Mountains, Public Art Production Fund and Nevada Museum of Art, Las Vegas, 2016

 

이번 부산 전시에서는 <mattituck> 이라는 연작이 전시 되었다. 일몰과 일출을 간단하게 3색의 색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우고 론디노네는 뉴욕 롱아일랜드 매티턱에서 그의 뮤즈이자 연인인 시인 존 지오르노와 지내며 감상했던 일출과 일몰을 그려낸 작품이라고 한다. 2019년 론디노네는 존 지오르노의 죽음 이후 이 시리즈를 그렸다고 한다. 그와의 추억을 영원히 작품으로 남기고 싶어서 였을까?

론디노네의 유명한 커다란 설치작품들과는 사뭇 다르게 아주 쁘띠한 사이즈였다그런 점은 재미있었고, 론디노네하면 떠오르는 거대작품을 만나지 못한 점은 아쉽기도 했다.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쓰여진 시를 읽은 기억은 거의 없는데, 시인 존 지오르노라는 이름이 이상하게도 낯익어 그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그는 앤디워홀의 연인이었고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다. 앤디워홀 최초의 영화인 <sleep>이 그의 잠자는 모습을 5시간 넘게 찍은 것이다. 교과서에서 배우던 앤디 워홀과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는 론디노네의 연인이자 뮤즈가 동일하다니 뭔가 신기했다. 그의 시도 언젠가 읽어보아야지.

 

Andy Warhol, Sleep

 

 

전시관을 나오면서 또 만난 론디노네의 작품 청석으로 만든 론디노네의 작품 <순종자>이다처음 <Human Nature>시리즈 작품을 미국 록펠러 센터 주위의 빌딩 숲에서 찍힌 사진으로 만났을 때는 굉장히 인상적이였다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현대 빌딩들 사이에 마치 판타지 세계에서나 볼법한 큰 청석 인간들이 서있으니 그 대비가 강렬했기 때문이다이번에 실제로 만난 순종자는 큰 사이즈의 작품이였지만 풀밭 사이에 있으니 정말 자연과 자연의 만남이라 하마터면 그냥 거기에 있던 돌이구나 하고 지나칠 수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다.

 

Human Nature, Public Art Fund, Rockefeller Plaza, New York, 2013

 

예술가들이 전시할때 어떻게 전시할 것인지 채광은 어떻게 할 것인지까지 고려하여 전시를 하는지 더욱 이해하게 되는 경험이였다. 작품 뿐만 아니라 자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모든 분야에서 마찬가지일 것이다사람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 작품을 보며 내가 어느 자리에 어울리고, 어느 곳에서 내 가치를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2022.05.06

 

2015 차이콥스키 콩쿨에서 만장일치로 우승을 차지한 피아니스트 드미트리 마슬레예프의 리사이틀이 부산문화회관에서 있어 다녀왔다.

 

2019년 울산에서 그의 좋은 연주를 봤던 기억이 있어서 기쁜 마음으로 공연에 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전쟁이라는 큰 이슈가 일어났다. 현재 유럽에서는 러시아인 상임지휘자도 해고한다는데, 차이콥스키 콩쿨의 세계 콩쿨 회원자격도 박탈된 상황에서 내가 차이콥스키 콩쿨 우승자 러시아인인 이 피아니스트의  공연을 보는 것이 과연 윤리적인가 하는 고민을 했다. 그의 연주는 좋았지만 양심은 가책을 떨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예술을 예술로만 생각할 수 없게하는 전쟁이 어서 빨리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주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였던 곡이라면 물론 1부 전체를 채웠던 차이콥스키의 사계였다. 멜로디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차이콥스키의 음악인 만큼 12개 소품 중 익숙한 곡이 많았지만, 이렇게 전곡을 한번에 들은 적은 처음이었다. 차이콥스키가 표현한 12달의 모습은 아름답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한 느낌이었다. 차이콥스키 사계 중 6월과 10월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데 여러 연주자 버전 중 가장 자주 듣는 조성진의 차이콥스키 10월 연주 영상도 살짝 올려본다.

 

 

조성진, Tchaikovsky: The Seasons, Op. 37b, 10. October: Autumn's Song

 

 

프로그램 중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은 내가 라벨의 곡을 좋아하기 때문에 라벨의 곡이였다. 정작 공연에서 맘에 들었던 곡은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의 곡들이였다. 마슬레예프의 화려한 기교와 그 만의 해석이 그 두 작곡가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공연을 보러가기 전 예상과 달리 라벨의 곡이 아닌 다른 곡의 여운에 잠겨 집에 돌아왔다. 이런 의외의 수확이 문화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의 즐거움이 아닐까 생각한다.

 

5. Loving Vincent [돌문예]

2022. 4. 9. 16:15

 

개봉했을 때 보고 싶었던 영화였던 러빙 빈센트. 시간이 바빠 그때는 영화관에서 보지 못했는데 과제 덕분에 넷플릭스에서 보게 되었다.

 

러빙 빈센트라는 영화 제목은 빈센트 반 고흐가 그의 동생인 테오 반 고흐에게 남긴 600통이 넘는 편지에서 항상 '사랑하는 빈센트로부터'라 적었던 것에서 따왔다고 한다. 100명이 넘는 화가가 10년을 고흐의 화풍으로 유화를 그려내어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작품이다. 고흐의 죽음 1년 후 고흐의 친구인 아버지의 부탁에 빈센트의 편지를 테오에게 전하기 위해 떠났다가 고흐의 미스터리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흐와 관련된 장소, 사람들과 만나게 되는 이야기이다. 사실 영화가 점점 진행되며 타살인지 자살인지 고흐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는 고흐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에 초점을 맞춘 영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빈센트 반 고흐를 떠올리면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 자신의 귀를 자른 괴팍한 화가를 떠올리기 쉬울 것이다. 나 역시 그의 그림을 좋아하지만 빈센트 반 고흐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는 참 얕았던 것 같다. 영화에 소개되는 고흐의 편지를 보며 그는 그에게는 팍팍했을 세상에도 따듯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되고, 자신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랑을 느낄 때인 것 같다.

나는 내 그림으로 사람을 어루만지고 싶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길 바란다. 마음이 깊은 사람이구나.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구나.

 

 

 

빈센트 반 고흐의 헌정곡으로 유명한 빈센트라는 곡의 가사를 보면 이런 부분이 있다.

Now, I think I know what you tried to say to me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re not listening still
Perhaps they never will

 

너무나 잘 써낸 가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사의 화자처럼 이제 나도 나름대로 고흐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를 했지만, 고흐의 대부분의 이웃들처럼 아직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현재 한국의 사회문제가 떠올랐다. 무료할때 자주 시사 프로그램을 보는데, 꾸준하게 정신질환자들에 의한 범죄가 사회문제가 되어 그들에 대한 비난이 이어지니, 치료하지 않고 숨고 치료를 거부하고 증상이 악화되어 다시 범죄가 일어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떤 전문가는 현재 정신질환자들이 사회에서 이해받지 못해 숨기 때문에 더 큰 범죄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요지로 말했다. 미흡하게 관리되는 것도 물론 커다란 문제이지만, 너무나 관용이 없는 현재 한국 사회가 그들을 치료를 선택하기보다 자신의 질병을 숨기기를 선택하기를 강요해 그런 범죄가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그들이 숨어 전문가가 아닌 가족 수준의 돌봄만을 받는다면 악화될 가능성이 너무나 높다. 나도 "또 조현병" 이런 자극적인 언론보도에 관심을 가지면서 병에 대한 이해에는 너무 소홀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범죄는 용서받을 수 없지만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건 사회가 아닐까.

 

 

고흐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있지만, 어떤 병이었는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연구진들이 편지 등을 분석한 결과 빈센트 반 고흐는 조울증이나 경계성 인격장애를 겪었을 확률이 높고 초점 간질을 앓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https://www.bbc.com/korean/international-54836666

 

130년 만에 밝혀진 반 고흐의 '마음의 병' - BBC News 코리아

연구팀은 고흐가 '조현병'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봤다.

www.bbc.com

 

 

좋은 영화였다. 재개봉을 한다면 꼭 영화관에서 다시 만나야겠다. 그리고 글은 이렇게 마치고 싶다.

Loving Vincent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은 윤동주가 아닐까? 나 역시 윤동주의 시를 좋아해서 전집을 가지고 있다. 좋아하는 윤동주의 시로 과제를 하면 행복할 것 같아 오랜만에 책을 폈는데 이 시가 마음에 들어왔다.

 

윤동주는 1939년부터 1940년 12월까지 일 년 이상 시를 쓰지 않았다. 그 시기 우리나라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우리의 말과 성을 빼앗기고 심지어 윤동주의 스승이 일제의 정책과 반대로 조선어 수업을 열었다가 체포되었다. 윤동주는 참담한 심정에 시를 쓰지 못했을까? 이후 윤동주는 <위로>, <팔복>, <병원> 이 세시를 비슷한 시기 써내면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중 <위로>와 <병원>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중 <병원>은 아주 유명한 시이다. 윤동주는 <병원>이 자신의 대표작이라 생각해 시집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아니라 <병원>으로 하려 했다. 나 역시 <병원>을 좋아하지만, <위로>가 지금 나에게 더 와닿는 이유는 무엇일까. <병원>에선 화자가 가만히 병실로 돌아간 여자가 누웠던 자리에 그의 쾌유를 바라며 누워보지만, <위로>에서는 그에게 위로를 건네기 때문인가 보다.

 

화자는 자신이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음에 안타까워 하지만 화자가 거미줄을 헝클어서 다음 나비는 꽃밭에 날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위로의 힘을 믿는다. 긴 간병생활에 지쳤을 때 한 간호사 선생님이 건넸던 위로의 말은 얼마나 따뜻했었나. 환자와 환자의 가족이 병원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의료인은 간호사이다. 그래서 간호사는 환자의 신체적 상태, 정서적 상태에 대해 가장 잘 알 수 있는 의료인이다. 환자의 보호자인 나에게 그런 이가 건네는 위로는 생각보다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진심으로 위로를 건넬 수 있는 간호사가 되고 싶다.

 

오랜만에 찾은 부산시립미술관. 이번에 관람한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전은 이우환 작가가 선정한 작가의 전시 시리즈인 이우환과 친구들 기획 전시였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첫 유작전이기도 해서 굉장한 관심을 받고 있는 전시라는 동행의 말에 설레는 마음으로 미술관에 도착했다.

 

 

“나는 어디에서 죽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딘가에서 전시를 준비하다 죽을 것 같아요.... 그리고 아주 먼 나라에 있을 것 같군요. 울란바토르에서 회고전을 진행한다거나요. 늙은 광대처럼, 언제나 여행하다 길 위에서 죽는 거예요.”

 

- 부산시립미술관은 이우환과 그 친구들 시리즈 세 번째 전시로 《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 4.4 》전을 개최한다. 1997년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 이후 진행하는 작가의 국내 최대 회고전이자 작가의 첫 유고전이다. 전시 제목 “4.4”는 그가 태어난 해 1944년을 의미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숫자 4가 “死(죽을 사)” 와 발음이 같아 죽음을 상징하는 숫자라는 것이 흥미롭다고 작가는 말했다. 작가는 전시 준비 기간 중 어렴풋이 자신의 삶의 여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작가에게 지금의 시간은 인생을 4단계(생로병사, 生老病死)로 나눌 때 ‘마지막 생의 단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작가가 직접 선택한 타이틀이다. 또한, 4라는 숫자 다음에 표기된 마침표는 그의 인생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기표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는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총 43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지난 7월 14일 타계하기 전, 전시를 위한 작품 선정에서부터 작품 수정 보완 및 공간 디자인까지 마무리하였다. 전시는 본관 3층과 이우환 공간 1층에서 이루어지며 그가 직접 한글로 디자인한 “출발(Départ)”, “도착(Arrivée)”, 그리고 “Après(그 후)”가 출품된다. 이러한 텍스트는 섹션을 구분하는 단어라기보다는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그가 전 생애에 걸쳐 관객에게 던졌던 질문인 “삶과 죽음”에 대한 이정표 역할을 한다. 흔히 그는 ‘쇼아(Shoah)’ 작가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 내면의 함축적인 메시지인 존재와 부재,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을 환기시킨다. 예술에서 죽음이라는 주제를 꺼내는 것은 언제나 불편한 일이지만 볼탕스키는 그 불편한 진실을 끊임없이 찾아 나섰다.

특히 그는 코로나로 인해 더 이상 죽음을 숨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인식하였다. 동양에서 죽음은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자본주의 이후 서양 사회에서 죽음은 완전히 부인되고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라는 전염병으로 우리 곁에 죽음이 늘 존재하며 “죽음은 현재”라고 이야기했다. 4.4라는 전시 타이틀이 드러내듯 작가는 이 전시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마지막 전시임을 예감하고 있었고, 작가의 전 생을 거쳐 탐구해온 ‘죽음’이란 키워드를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질문하고 있다.

-부산시립미술관 전시소개

 

 

 

 

 

 

작가의 초기작부터 대표작까지 전시되어있고 이 전시를 위해 새롭게 한글로 디자인한 작품까지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전시된 작품들 중 다수가 죽음에 대해 다루는 만큼 가끔씩 흠칫하기도 하고, 한눈에 아름답다 느끼기보다는 보는 이로 하여금 생각을 하도록 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가장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던 작품인 <저장소:카나다>, 카나다는 나치가 억류된 유대인의 소지품을 남겨둔 창고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큰 벽면을 가득 채운 주인을 알 수 없는 옷들이 압도적 느낌을 주는 대형작품이었다. 버려진 옷가지는 여러 예술작품에서 자주 옷의 주인의 죽음을 의미하는 요소로 사용된다. 그래서 작품명과 작품 설명을 듣기 전에도 이 작품도 홀로코스트에 대한 작품이구나 하고 직감할 수 있었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는 유대인으로 쇼아(Shoah:히브리어로 고통, 홀로코스트를 의미한다고 한다) 작가로 불리며 홀로코스트와 죽음에 대한 작품을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는 1944년생으로 직접적으로 나치에 의한 홀로코스트 피해를 입은 세대는 아니었지만, 홀로코스트는 그의 작품에 정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가장 내 마음에 들었던 작품인 <잠재의식>. 눈이 나뭇가지에 쌓이고, 하늘엔 새가 날아다니고, 해 질 녘 아름답게 바다가 부서지는 아름다운 광경 중간중간 끔찍한 장면들이 흑백 노이즈처럼 지나갔다. 나는 이 작품이 작가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아닌가 생각한다. 홀로코스트는 끝이 났고 자신은 그 시대의 직접적 피해자는 아니지만 그의 가족과 이웃이 겪었던 시대적 트라우마는 불쑥불쑥 그의 잠재의식에 남아있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잠재의식>의 작품 해설을 보면 여기에서 나오는 끔찍한 장면들은 20세기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던 잔혹행위들의 모습이라고 한다. 어느새 볼탕스키는 홀로코스트만이 아니라 시대적 트라우마에 대한 여러 소재들을 활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치적 학살로 죽은 이들이 묻힌 사막에 꽃같은 풍경을 꼽아놓고 그 풍경이 흔들리는 모습을 계속 찍어놓은 작품도 있었다. 최근작인 <설국>에서는 (요즘의 병원은 그렇지 않다지만) 병원을 연상시키는 하얀 전시공간에 천무덤과 led조명을 배치해서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매일 뉴스에서 보는 사망자통계와 같은 죽음의 일상화를 의미하는 듯 했다. 이렇게 인간의 보편적 죽음에 대한 작품까지 아주 다양한 그의 작품을 만났다.

 

 

나는 볼탕스키전을 보면서 계속 뭉크가 떠올랐다. 뭉크와 볼탕스키 둘 다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고, 그 트라우마를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 공통점이고 또 아버지가 의사라는 것도 신기하게도 동일했다. 내가 뭉크의 작품을 보며 느낀 점은 뭉크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작품에 그려내며 자가치유를 해나가지 않았을까라는 점이다. 뭉크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절규도 판화버전, 유화 등 여러 작품이 있는 것을 보면서 어딘가에서 읽었던 미술치료에서 트라우마를 직면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오히려 자기치유가 된다는 것이 떠올랐다. 뭉크는 동일한 주제의 비슷한 작품을 제작하면서 그래도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를 견뎌낼 수 있지 않았을까. 자신이 가진 감정, 트라우마 등을 마주하는 것에서부터 치유가 시작될 수 있다. 자신을 잘 살펴보자.

2. 도착 [돌문예]

2022. 3. 31. 22:13

 

 

(기어코) 떠나가는 내 모습
저 멀리서 바라보는 너 안녕
(나 이제) 깊은 잠을 자려해
구름 속에 날 가둔 채
낯선 하늘에 닿을 때까지

낮밤 눈동자색 첫인사까지 모두 바뀌면
추억 미련 그리움은 흔한 이방인의 고향얘기

잘 도착했어 제일 좋은 건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아
차창 밖 흩어지는 낯선 가로수
한번도 기댄 적 없는
잘 살 것 같아 제일 좋은 건
아무도 날 위로하지 않아
눌러 싼 가방 속 그 짐
어디에도 넌 아마 없을 걸
어쩌다 정말 가끔
어쩌다 니가 떠오르는 밤이 오면
잔을 든 이방인은 날개가 되어 어디든 가겠지
저 멀리 저 멀리
 
 
월간 윤종신 2012 5월호 - 도착 with 박정현
 

 

시간이 나면 훌쩍 혼자 비행기를 타고 해외 여기저기로 쏘다니는 생활을 몇년간 했다. 세상의 여타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여러번 반복되니 처음 여행처럼 해외로 나가는 설렘 그런 것들은 많이 없어졌고, 여행짐은 정말 효율적으로 빨리 잘 싸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외국의 뭐가 그리 좋아 온갖 나라를 다녔을까 생각해보았다. 사실 외국에서는 집이 가장 그리웠으면서도.

비행기 안에서는 자주 이 노래를 반복재생한 상태로 멍하게 있었다. 여행을 소재로 하는 다른 노래도 많은데 왜 꼭 이 노래였을까 생각해보니 이 노래가 내 상황에 이입하기 쉬웠기 때문인것 같기도 하다. 업무, 걱정, 가족들의 연락도 비행기 안 아니 해외에서는 유심, 로밍 핑계로 멀리할 수 있었으니까. 아무 연고가 없는 곳에 가는 노래의 화자와 같은 심정이었으니. 그러고 보면 약간의 우울증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여행은 좋은 자가 치료 였던것 같기도 하다. 예전의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핸드폰을 몇시간은 꺼놓아 보기를 권한다. 그 시간에 자신 외에 다른 것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내 우울의 큰 이유였던 직업은 다른 사람이 보기엔 무난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서 어떤 보람도, 어떤 가치도 찾지 못했고 가족과 떨어져 타지생활하는 것에도 지쳤었다. 내가 그때 나를 잘 돌아보고 전문가와 상담했으면 가장 좋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운이좋게 나를 항상 지지해주는 어머니와 대화를 통해 내 생각을 정리해 퇴사를 하고 편입을 준비하게 되었다.

조금은 충동적으로 보이겠지만 몇년전 아버지를 보내드리면서 만났던 병동의 간호사 선생님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팬데믹 전이라 그 때는 환자, 보호자, 방문객들이 병동에 참 많았다. 심지어 아버지가 돌아가셨던건 낮이라 이불이 머리까지 덮힌 베드를 밀고가는 뒤를 쫒으며 울고있는 우리를 많은 사람들이 병실밖까지 나와서 구경했다. 그 모습을 보고 병실에서 뭔가를 하시던 중이던 간호사 선생님이 나오시더니 구경하는 사람을 제지하셨었다. 그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 모습을 좇아 여기까지 왔다. 좋은 간호사가, 좋은 의료인이 되고싶다.

나는 월간 윤종신이라는 윤종신님의 작업방식을 참 좋아하는 편이고 그렇게 발매한 음원을 꼭 들어 보는 편이다. 따져보면 매달 발매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달 발표를 염두에 두고 곡을 써내는 것이 처음엔 신기하기도 했다. 사실 우리는 작가나, 작곡가, 화가 등 소위 창작하는 직업에 대해 번뜩 떠오르는 영감, 그 사람이 타고난 창의성을 떠올리기 쉽다. 그래서 나 역시 매달 곡을 내는 것이 생소했다. 예술가는 변덕스러워 엄청난 텀을 두고 작품을 발매하거나 한꺼번에 작품을 쏟아낼 것 같다는 편견이 나에게도 있었나 보다. 생각해보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작가인 하루키나 스티븐 킹을 보면 매일 작업하는 양을 정해두고 창작이라는 노동을 한다. 월간작업도 이와 같지 않을까? 예술이 한순간의 천재성의 발휘가 아니라 그 안의 내실이 갖춰진 후에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시는 교수님 말씀에 또 이 곡이 떠올랐다. 그들처럼 하루하루 충실히 내실을 다져나가야지.

당신에게 의미가 남달라 읽고 또 읽는 책.

나에게 있어 박경리작가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가 그러한 책이기에 소개하고 싶었다.

 

 

이 시집의 제목은 시집에 실린 시 중 하나인 '옛날의 그 집' 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전략)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살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책띠에 있는 이 시를 보고 시집을 사게 되었다. 시집을 살 당시 나는 소중한 이를 떠나보낸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떠나신 그분이 시의 화자처럼 모진 세월을 지나 삶을 마무리 할때 그래도 홀가분하셨기를 바랐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시집을 읽으면서 그분을 떠올리며 많이 울고말았다. 왜냐하면 시집에서 박경리 작가의 비우고 또 가다듬는 과정을 보면서 암센터에서 집근처 병원으로 돌아오고 난 후, 주위를 차례대로 정리하던 그분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임상현장에서 일을 하게되면 환자의 회복, 탄생의 기쁨과 함께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반대로 환자의 죽음과 마주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호스피스병동에서 일을 하게 된다면 말기 환자의 삶의 마무리를 함께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환자가 존엄성을 잃지 않도록 돕는것이 우리의 역할일 것이다. 

호스피스 간호 중 극심한 고통을 덜어내 주는 신체적 간호가 큰 부분일테지만, 환자와 환자의 가족이 가장 자주 접하는 의료인인만큼 간호사가 주는 정서적 간호도 중요할 것이다. 그런 정서적 간호를 위해서는 대상자인 인간, 말기환자, 말기환자가 생각하는 죽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살면서 우리는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우지만, 인간은 한번 죽으므로 죽음을 경험으로 배울 수 없다. 이렇게 문학작품이나 문화예술을 통해 죽음에 대해 숙고해보는 것이 훗날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