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찾은 부산시립미술관. 이번에 관람한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전은 이우환 작가가 선정한 작가의 전시 시리즈인 이우환과 친구들 기획 전시였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첫 유작전이기도 해서 굉장한 관심을 받고 있는 전시라는 동행의 말에 설레는 마음으로 미술관에 도착했다.

 

 

“나는 어디에서 죽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딘가에서 전시를 준비하다 죽을 것 같아요.... 그리고 아주 먼 나라에 있을 것 같군요. 울란바토르에서 회고전을 진행한다거나요. 늙은 광대처럼, 언제나 여행하다 길 위에서 죽는 거예요.”

 

- 부산시립미술관은 이우환과 그 친구들 시리즈 세 번째 전시로 《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 4.4 》전을 개최한다. 1997년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 이후 진행하는 작가의 국내 최대 회고전이자 작가의 첫 유고전이다. 전시 제목 “4.4”는 그가 태어난 해 1944년을 의미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숫자 4가 “死(죽을 사)” 와 발음이 같아 죽음을 상징하는 숫자라는 것이 흥미롭다고 작가는 말했다. 작가는 전시 준비 기간 중 어렴풋이 자신의 삶의 여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작가에게 지금의 시간은 인생을 4단계(생로병사, 生老病死)로 나눌 때 ‘마지막 생의 단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작가가 직접 선택한 타이틀이다. 또한, 4라는 숫자 다음에 표기된 마침표는 그의 인생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기표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는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총 43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지난 7월 14일 타계하기 전, 전시를 위한 작품 선정에서부터 작품 수정 보완 및 공간 디자인까지 마무리하였다. 전시는 본관 3층과 이우환 공간 1층에서 이루어지며 그가 직접 한글로 디자인한 “출발(Départ)”, “도착(Arrivée)”, 그리고 “Après(그 후)”가 출품된다. 이러한 텍스트는 섹션을 구분하는 단어라기보다는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그가 전 생애에 걸쳐 관객에게 던졌던 질문인 “삶과 죽음”에 대한 이정표 역할을 한다. 흔히 그는 ‘쇼아(Shoah)’ 작가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 내면의 함축적인 메시지인 존재와 부재,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을 환기시킨다. 예술에서 죽음이라는 주제를 꺼내는 것은 언제나 불편한 일이지만 볼탕스키는 그 불편한 진실을 끊임없이 찾아 나섰다.

특히 그는 코로나로 인해 더 이상 죽음을 숨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인식하였다. 동양에서 죽음은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자본주의 이후 서양 사회에서 죽음은 완전히 부인되고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라는 전염병으로 우리 곁에 죽음이 늘 존재하며 “죽음은 현재”라고 이야기했다. 4.4라는 전시 타이틀이 드러내듯 작가는 이 전시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마지막 전시임을 예감하고 있었고, 작가의 전 생을 거쳐 탐구해온 ‘죽음’이란 키워드를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질문하고 있다.

-부산시립미술관 전시소개

 

 

 

 

 

 

작가의 초기작부터 대표작까지 전시되어있고 이 전시를 위해 새롭게 한글로 디자인한 작품까지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전시된 작품들 중 다수가 죽음에 대해 다루는 만큼 가끔씩 흠칫하기도 하고, 한눈에 아름답다 느끼기보다는 보는 이로 하여금 생각을 하도록 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가장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던 작품인 <저장소:카나다>, 카나다는 나치가 억류된 유대인의 소지품을 남겨둔 창고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큰 벽면을 가득 채운 주인을 알 수 없는 옷들이 압도적 느낌을 주는 대형작품이었다. 버려진 옷가지는 여러 예술작품에서 자주 옷의 주인의 죽음을 의미하는 요소로 사용된다. 그래서 작품명과 작품 설명을 듣기 전에도 이 작품도 홀로코스트에 대한 작품이구나 하고 직감할 수 있었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는 유대인으로 쇼아(Shoah:히브리어로 고통, 홀로코스트를 의미한다고 한다) 작가로 불리며 홀로코스트와 죽음에 대한 작품을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는 1944년생으로 직접적으로 나치에 의한 홀로코스트 피해를 입은 세대는 아니었지만, 홀로코스트는 그의 작품에 정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가장 내 마음에 들었던 작품인 <잠재의식>. 눈이 나뭇가지에 쌓이고, 하늘엔 새가 날아다니고, 해 질 녘 아름답게 바다가 부서지는 아름다운 광경 중간중간 끔찍한 장면들이 흑백 노이즈처럼 지나갔다. 나는 이 작품이 작가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아닌가 생각한다. 홀로코스트는 끝이 났고 자신은 그 시대의 직접적 피해자는 아니지만 그의 가족과 이웃이 겪었던 시대적 트라우마는 불쑥불쑥 그의 잠재의식에 남아있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잠재의식>의 작품 해설을 보면 여기에서 나오는 끔찍한 장면들은 20세기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던 잔혹행위들의 모습이라고 한다. 어느새 볼탕스키는 홀로코스트만이 아니라 시대적 트라우마에 대한 여러 소재들을 활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치적 학살로 죽은 이들이 묻힌 사막에 꽃같은 풍경을 꼽아놓고 그 풍경이 흔들리는 모습을 계속 찍어놓은 작품도 있었다. 최근작인 <설국>에서는 (요즘의 병원은 그렇지 않다지만) 병원을 연상시키는 하얀 전시공간에 천무덤과 led조명을 배치해서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매일 뉴스에서 보는 사망자통계와 같은 죽음의 일상화를 의미하는 듯 했다. 이렇게 인간의 보편적 죽음에 대한 작품까지 아주 다양한 그의 작품을 만났다.

 

 

나는 볼탕스키전을 보면서 계속 뭉크가 떠올랐다. 뭉크와 볼탕스키 둘 다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고, 그 트라우마를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 공통점이고 또 아버지가 의사라는 것도 신기하게도 동일했다. 내가 뭉크의 작품을 보며 느낀 점은 뭉크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작품에 그려내며 자가치유를 해나가지 않았을까라는 점이다. 뭉크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절규도 판화버전, 유화 등 여러 작품이 있는 것을 보면서 어딘가에서 읽었던 미술치료에서 트라우마를 직면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오히려 자기치유가 된다는 것이 떠올랐다. 뭉크는 동일한 주제의 비슷한 작품을 제작하면서 그래도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를 견뎌낼 수 있지 않았을까. 자신이 가진 감정, 트라우마 등을 마주하는 것에서부터 치유가 시작될 수 있다. 자신을 잘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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