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Loving Vincent [돌문예]

2022. 4. 9. 16:15

 

개봉했을 때 보고 싶었던 영화였던 러빙 빈센트. 시간이 바빠 그때는 영화관에서 보지 못했는데 과제 덕분에 넷플릭스에서 보게 되었다.

 

러빙 빈센트라는 영화 제목은 빈센트 반 고흐가 그의 동생인 테오 반 고흐에게 남긴 600통이 넘는 편지에서 항상 '사랑하는 빈센트로부터'라 적었던 것에서 따왔다고 한다. 100명이 넘는 화가가 10년을 고흐의 화풍으로 유화를 그려내어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작품이다. 고흐의 죽음 1년 후 고흐의 친구인 아버지의 부탁에 빈센트의 편지를 테오에게 전하기 위해 떠났다가 고흐의 미스터리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흐와 관련된 장소, 사람들과 만나게 되는 이야기이다. 사실 영화가 점점 진행되며 타살인지 자살인지 고흐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는 고흐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에 초점을 맞춘 영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빈센트 반 고흐를 떠올리면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 자신의 귀를 자른 괴팍한 화가를 떠올리기 쉬울 것이다. 나 역시 그의 그림을 좋아하지만 빈센트 반 고흐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는 참 얕았던 것 같다. 영화에 소개되는 고흐의 편지를 보며 그는 그에게는 팍팍했을 세상에도 따듯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되고, 자신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랑을 느낄 때인 것 같다.

나는 내 그림으로 사람을 어루만지고 싶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길 바란다. 마음이 깊은 사람이구나.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구나.

 

 

 

빈센트 반 고흐의 헌정곡으로 유명한 빈센트라는 곡의 가사를 보면 이런 부분이 있다.

Now, I think I know what you tried to say to me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re not listening still
Perhaps they never will

 

너무나 잘 써낸 가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사의 화자처럼 이제 나도 나름대로 고흐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를 했지만, 고흐의 대부분의 이웃들처럼 아직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현재 한국의 사회문제가 떠올랐다. 무료할때 자주 시사 프로그램을 보는데, 꾸준하게 정신질환자들에 의한 범죄가 사회문제가 되어 그들에 대한 비난이 이어지니, 치료하지 않고 숨고 치료를 거부하고 증상이 악화되어 다시 범죄가 일어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떤 전문가는 현재 정신질환자들이 사회에서 이해받지 못해 숨기 때문에 더 큰 범죄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요지로 말했다. 미흡하게 관리되는 것도 물론 커다란 문제이지만, 너무나 관용이 없는 현재 한국 사회가 그들을 치료를 선택하기보다 자신의 질병을 숨기기를 선택하기를 강요해 그런 범죄가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그들이 숨어 전문가가 아닌 가족 수준의 돌봄만을 받는다면 악화될 가능성이 너무나 높다. 나도 "또 조현병" 이런 자극적인 언론보도에 관심을 가지면서 병에 대한 이해에는 너무 소홀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범죄는 용서받을 수 없지만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건 사회가 아닐까.

 

 

고흐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있지만, 어떤 병이었는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연구진들이 편지 등을 분석한 결과 빈센트 반 고흐는 조울증이나 경계성 인격장애를 겪었을 확률이 높고 초점 간질을 앓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https://www.bbc.com/korean/international-54836666

 

130년 만에 밝혀진 반 고흐의 '마음의 병' - BBC News 코리아

연구팀은 고흐가 '조현병'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봤다.

www.bbc.com

 

 

좋은 영화였다. 재개봉을 한다면 꼭 영화관에서 다시 만나야겠다. 그리고 글은 이렇게 마치고 싶다.

Loving Vincent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은 윤동주가 아닐까? 나 역시 윤동주의 시를 좋아해서 전집을 가지고 있다. 좋아하는 윤동주의 시로 과제를 하면 행복할 것 같아 오랜만에 책을 폈는데 이 시가 마음에 들어왔다.

 

윤동주는 1939년부터 1940년 12월까지 일 년 이상 시를 쓰지 않았다. 그 시기 우리나라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우리의 말과 성을 빼앗기고 심지어 윤동주의 스승이 일제의 정책과 반대로 조선어 수업을 열었다가 체포되었다. 윤동주는 참담한 심정에 시를 쓰지 못했을까? 이후 윤동주는 <위로>, <팔복>, <병원> 이 세시를 비슷한 시기 써내면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중 <위로>와 <병원>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중 <병원>은 아주 유명한 시이다. 윤동주는 <병원>이 자신의 대표작이라 생각해 시집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아니라 <병원>으로 하려 했다. 나 역시 <병원>을 좋아하지만, <위로>가 지금 나에게 더 와닿는 이유는 무엇일까. <병원>에선 화자가 가만히 병실로 돌아간 여자가 누웠던 자리에 그의 쾌유를 바라며 누워보지만, <위로>에서는 그에게 위로를 건네기 때문인가 보다.

 

화자는 자신이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음에 안타까워 하지만 화자가 거미줄을 헝클어서 다음 나비는 꽃밭에 날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위로의 힘을 믿는다. 긴 간병생활에 지쳤을 때 한 간호사 선생님이 건넸던 위로의 말은 얼마나 따뜻했었나. 환자와 환자의 가족이 병원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의료인은 간호사이다. 그래서 간호사는 환자의 신체적 상태, 정서적 상태에 대해 가장 잘 알 수 있는 의료인이다. 환자의 보호자인 나에게 그런 이가 건네는 위로는 생각보다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진심으로 위로를 건넬 수 있는 간호사가 되고 싶다.

 

오랜만에 찾은 부산시립미술관. 이번에 관람한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전은 이우환 작가가 선정한 작가의 전시 시리즈인 이우환과 친구들 기획 전시였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첫 유작전이기도 해서 굉장한 관심을 받고 있는 전시라는 동행의 말에 설레는 마음으로 미술관에 도착했다.

 

 

“나는 어디에서 죽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딘가에서 전시를 준비하다 죽을 것 같아요.... 그리고 아주 먼 나라에 있을 것 같군요. 울란바토르에서 회고전을 진행한다거나요. 늙은 광대처럼, 언제나 여행하다 길 위에서 죽는 거예요.”

 

- 부산시립미술관은 이우환과 그 친구들 시리즈 세 번째 전시로 《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 4.4 》전을 개최한다. 1997년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 이후 진행하는 작가의 국내 최대 회고전이자 작가의 첫 유고전이다. 전시 제목 “4.4”는 그가 태어난 해 1944년을 의미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숫자 4가 “死(죽을 사)” 와 발음이 같아 죽음을 상징하는 숫자라는 것이 흥미롭다고 작가는 말했다. 작가는 전시 준비 기간 중 어렴풋이 자신의 삶의 여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작가에게 지금의 시간은 인생을 4단계(생로병사, 生老病死)로 나눌 때 ‘마지막 생의 단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작가가 직접 선택한 타이틀이다. 또한, 4라는 숫자 다음에 표기된 마침표는 그의 인생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기표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는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총 43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지난 7월 14일 타계하기 전, 전시를 위한 작품 선정에서부터 작품 수정 보완 및 공간 디자인까지 마무리하였다. 전시는 본관 3층과 이우환 공간 1층에서 이루어지며 그가 직접 한글로 디자인한 “출발(Départ)”, “도착(Arrivée)”, 그리고 “Après(그 후)”가 출품된다. 이러한 텍스트는 섹션을 구분하는 단어라기보다는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그가 전 생애에 걸쳐 관객에게 던졌던 질문인 “삶과 죽음”에 대한 이정표 역할을 한다. 흔히 그는 ‘쇼아(Shoah)’ 작가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 내면의 함축적인 메시지인 존재와 부재,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을 환기시킨다. 예술에서 죽음이라는 주제를 꺼내는 것은 언제나 불편한 일이지만 볼탕스키는 그 불편한 진실을 끊임없이 찾아 나섰다.

특히 그는 코로나로 인해 더 이상 죽음을 숨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인식하였다. 동양에서 죽음은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자본주의 이후 서양 사회에서 죽음은 완전히 부인되고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라는 전염병으로 우리 곁에 죽음이 늘 존재하며 “죽음은 현재”라고 이야기했다. 4.4라는 전시 타이틀이 드러내듯 작가는 이 전시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마지막 전시임을 예감하고 있었고, 작가의 전 생을 거쳐 탐구해온 ‘죽음’이란 키워드를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질문하고 있다.

-부산시립미술관 전시소개

 

 

 

 

 

 

작가의 초기작부터 대표작까지 전시되어있고 이 전시를 위해 새롭게 한글로 디자인한 작품까지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전시된 작품들 중 다수가 죽음에 대해 다루는 만큼 가끔씩 흠칫하기도 하고, 한눈에 아름답다 느끼기보다는 보는 이로 하여금 생각을 하도록 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가장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던 작품인 <저장소:카나다>, 카나다는 나치가 억류된 유대인의 소지품을 남겨둔 창고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큰 벽면을 가득 채운 주인을 알 수 없는 옷들이 압도적 느낌을 주는 대형작품이었다. 버려진 옷가지는 여러 예술작품에서 자주 옷의 주인의 죽음을 의미하는 요소로 사용된다. 그래서 작품명과 작품 설명을 듣기 전에도 이 작품도 홀로코스트에 대한 작품이구나 하고 직감할 수 있었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는 유대인으로 쇼아(Shoah:히브리어로 고통, 홀로코스트를 의미한다고 한다) 작가로 불리며 홀로코스트와 죽음에 대한 작품을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는 1944년생으로 직접적으로 나치에 의한 홀로코스트 피해를 입은 세대는 아니었지만, 홀로코스트는 그의 작품에 정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가장 내 마음에 들었던 작품인 <잠재의식>. 눈이 나뭇가지에 쌓이고, 하늘엔 새가 날아다니고, 해 질 녘 아름답게 바다가 부서지는 아름다운 광경 중간중간 끔찍한 장면들이 흑백 노이즈처럼 지나갔다. 나는 이 작품이 작가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아닌가 생각한다. 홀로코스트는 끝이 났고 자신은 그 시대의 직접적 피해자는 아니지만 그의 가족과 이웃이 겪었던 시대적 트라우마는 불쑥불쑥 그의 잠재의식에 남아있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잠재의식>의 작품 해설을 보면 여기에서 나오는 끔찍한 장면들은 20세기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던 잔혹행위들의 모습이라고 한다. 어느새 볼탕스키는 홀로코스트만이 아니라 시대적 트라우마에 대한 여러 소재들을 활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치적 학살로 죽은 이들이 묻힌 사막에 꽃같은 풍경을 꼽아놓고 그 풍경이 흔들리는 모습을 계속 찍어놓은 작품도 있었다. 최근작인 <설국>에서는 (요즘의 병원은 그렇지 않다지만) 병원을 연상시키는 하얀 전시공간에 천무덤과 led조명을 배치해서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매일 뉴스에서 보는 사망자통계와 같은 죽음의 일상화를 의미하는 듯 했다. 이렇게 인간의 보편적 죽음에 대한 작품까지 아주 다양한 그의 작품을 만났다.

 

 

나는 볼탕스키전을 보면서 계속 뭉크가 떠올랐다. 뭉크와 볼탕스키 둘 다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고, 그 트라우마를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 공통점이고 또 아버지가 의사라는 것도 신기하게도 동일했다. 내가 뭉크의 작품을 보며 느낀 점은 뭉크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작품에 그려내며 자가치유를 해나가지 않았을까라는 점이다. 뭉크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절규도 판화버전, 유화 등 여러 작품이 있는 것을 보면서 어딘가에서 읽었던 미술치료에서 트라우마를 직면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오히려 자기치유가 된다는 것이 떠올랐다. 뭉크는 동일한 주제의 비슷한 작품을 제작하면서 그래도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를 견뎌낼 수 있지 않았을까. 자신이 가진 감정, 트라우마 등을 마주하는 것에서부터 치유가 시작될 수 있다. 자신을 잘 살펴보자.

2. 도착 [돌문예]

2022. 3. 31. 22:13

 

 

(기어코) 떠나가는 내 모습
저 멀리서 바라보는 너 안녕
(나 이제) 깊은 잠을 자려해
구름 속에 날 가둔 채
낯선 하늘에 닿을 때까지

낮밤 눈동자색 첫인사까지 모두 바뀌면
추억 미련 그리움은 흔한 이방인의 고향얘기

잘 도착했어 제일 좋은 건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아
차창 밖 흩어지는 낯선 가로수
한번도 기댄 적 없는
잘 살 것 같아 제일 좋은 건
아무도 날 위로하지 않아
눌러 싼 가방 속 그 짐
어디에도 넌 아마 없을 걸
어쩌다 정말 가끔
어쩌다 니가 떠오르는 밤이 오면
잔을 든 이방인은 날개가 되어 어디든 가겠지
저 멀리 저 멀리
 
 
월간 윤종신 2012 5월호 - 도착 with 박정현
 

 

시간이 나면 훌쩍 혼자 비행기를 타고 해외 여기저기로 쏘다니는 생활을 몇년간 했다. 세상의 여타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여러번 반복되니 처음 여행처럼 해외로 나가는 설렘 그런 것들은 많이 없어졌고, 여행짐은 정말 효율적으로 빨리 잘 싸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외국의 뭐가 그리 좋아 온갖 나라를 다녔을까 생각해보았다. 사실 외국에서는 집이 가장 그리웠으면서도.

비행기 안에서는 자주 이 노래를 반복재생한 상태로 멍하게 있었다. 여행을 소재로 하는 다른 노래도 많은데 왜 꼭 이 노래였을까 생각해보니 이 노래가 내 상황에 이입하기 쉬웠기 때문인것 같기도 하다. 업무, 걱정, 가족들의 연락도 비행기 안 아니 해외에서는 유심, 로밍 핑계로 멀리할 수 있었으니까. 아무 연고가 없는 곳에 가는 노래의 화자와 같은 심정이었으니. 그러고 보면 약간의 우울증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여행은 좋은 자가 치료 였던것 같기도 하다. 예전의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핸드폰을 몇시간은 꺼놓아 보기를 권한다. 그 시간에 자신 외에 다른 것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내 우울의 큰 이유였던 직업은 다른 사람이 보기엔 무난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서 어떤 보람도, 어떤 가치도 찾지 못했고 가족과 떨어져 타지생활하는 것에도 지쳤었다. 내가 그때 나를 잘 돌아보고 전문가와 상담했으면 가장 좋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운이좋게 나를 항상 지지해주는 어머니와 대화를 통해 내 생각을 정리해 퇴사를 하고 편입을 준비하게 되었다.

조금은 충동적으로 보이겠지만 몇년전 아버지를 보내드리면서 만났던 병동의 간호사 선생님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팬데믹 전이라 그 때는 환자, 보호자, 방문객들이 병동에 참 많았다. 심지어 아버지가 돌아가셨던건 낮이라 이불이 머리까지 덮힌 베드를 밀고가는 뒤를 쫒으며 울고있는 우리를 많은 사람들이 병실밖까지 나와서 구경했다. 그 모습을 보고 병실에서 뭔가를 하시던 중이던 간호사 선생님이 나오시더니 구경하는 사람을 제지하셨었다. 그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 모습을 좇아 여기까지 왔다. 좋은 간호사가, 좋은 의료인이 되고싶다.

나는 월간 윤종신이라는 윤종신님의 작업방식을 참 좋아하는 편이고 그렇게 발매한 음원을 꼭 들어 보는 편이다. 따져보면 매달 발매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달 발표를 염두에 두고 곡을 써내는 것이 처음엔 신기하기도 했다. 사실 우리는 작가나, 작곡가, 화가 등 소위 창작하는 직업에 대해 번뜩 떠오르는 영감, 그 사람이 타고난 창의성을 떠올리기 쉽다. 그래서 나 역시 매달 곡을 내는 것이 생소했다. 예술가는 변덕스러워 엄청난 텀을 두고 작품을 발매하거나 한꺼번에 작품을 쏟아낼 것 같다는 편견이 나에게도 있었나 보다. 생각해보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작가인 하루키나 스티븐 킹을 보면 매일 작업하는 양을 정해두고 창작이라는 노동을 한다. 월간작업도 이와 같지 않을까? 예술이 한순간의 천재성의 발휘가 아니라 그 안의 내실이 갖춰진 후에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시는 교수님 말씀에 또 이 곡이 떠올랐다. 그들처럼 하루하루 충실히 내실을 다져나가야지.

당신에게 의미가 남달라 읽고 또 읽는 책.

나에게 있어 박경리작가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가 그러한 책이기에 소개하고 싶었다.

 

 

이 시집의 제목은 시집에 실린 시 중 하나인 '옛날의 그 집' 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전략)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살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책띠에 있는 이 시를 보고 시집을 사게 되었다. 시집을 살 당시 나는 소중한 이를 떠나보낸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떠나신 그분이 시의 화자처럼 모진 세월을 지나 삶을 마무리 할때 그래도 홀가분하셨기를 바랐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시집을 읽으면서 그분을 떠올리며 많이 울고말았다. 왜냐하면 시집에서 박경리 작가의 비우고 또 가다듬는 과정을 보면서 암센터에서 집근처 병원으로 돌아오고 난 후, 주위를 차례대로 정리하던 그분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임상현장에서 일을 하게되면 환자의 회복, 탄생의 기쁨과 함께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반대로 환자의 죽음과 마주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호스피스병동에서 일을 하게 된다면 말기 환자의 삶의 마무리를 함께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환자가 존엄성을 잃지 않도록 돕는것이 우리의 역할일 것이다. 

호스피스 간호 중 극심한 고통을 덜어내 주는 신체적 간호가 큰 부분일테지만, 환자와 환자의 가족이 가장 자주 접하는 의료인인만큼 간호사가 주는 정서적 간호도 중요할 것이다. 그런 정서적 간호를 위해서는 대상자인 인간, 말기환자, 말기환자가 생각하는 죽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살면서 우리는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우지만, 인간은 한번 죽으므로 죽음을 경험으로 배울 수 없다. 이렇게 문학작품이나 문화예술을 통해 죽음에 대해 숙고해보는 것이 훗날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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